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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빛의 과거

이번 달에 사서 읽은 두 책에서는 위안을 많이 받았다. 공감까지 넘보진 않더라도, 내 마음을 앞서 정리해준 문장들로 언제고 다시 떠올리게 될 책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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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답시고 적당히 예쁘고 안전한 말로 폼 잡는 꼴을 얼마나 많이 봐왔나. '감성'적인 것은 텅 빈 것이다. 그냥 적당히 있어보이고 싶은데 훼손당하기는 또 싫은 심리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감성, 감동, 힐링, 정...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그놈의 '느낌'이 뭐길래 그걸로 적당히 퉁치려는 한국어. 그 언어에 가지는 반감을 명확하게 분석하고 정리한 책이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까칠하고 정확한 글에는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부제가 설명하듯, '한국어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책이니까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언어가 어찌나 무례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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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는 올해 들어 처음 읽은 장편소설이다. 은희경의 글은 정말 지독하게 좋다. 내게 있어서 글 쓰는 장인, 대가, 하면 은희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장편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을만큼 잘 설계된 구성도 정말 감탄스러웠고, 흔히 과거 회상물에서 자주 쓰이는 '추억의 아이템 전시'가 없는 것도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 소설이 소설에 대한 소설이면서, 소설조차 닿지 못하는 삶에 더 주목하려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온 작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문장인데, 그 능력이 가질 수 있는 해로움을 또 경계하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다. 이토록 예리하고 예민한 글을 쓰는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렸을까.

그녀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늘 남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거나 우월감에 취한 게 아니라 단지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안에는 우연히 들어온 바람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그것이 빠져나가 텅 비워지곤 하는 허공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에게 번번이 끌려다니는 꼴이 되고 말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 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자신의 사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안 보이는 대다수는 어딘가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국사 강사의 말을 조금 바꿔보자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불만스러운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