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요네즈에 달걀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작년에 처음 알았다. 비건인 분들의 이야기에 일부러 나를 노출시킨 지 1년 정도 되었다. 죄책감과 불편함이 점점 커지고, 고기 소비량은 줄고 있다. 다행히 나처럼 늦게나마 비건에 대해 알아가며 조금씩 실천해가는 주변의 친구들이, 회사 동료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비건을 지향하는 분과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검색하면서 몇 가지 깨달았다. 일단 처음 깨달은 것은 '식당 100개 중에 99개는 비건이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비건 식당이 많지 않다고 막연하게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찾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더욱 와 닿았다. 그렇게 100개 중 99개의 식당을 넘겨버리면서 깨달았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아쉬운 일이 되진 않는구나'.
좋아하는 사람과 즐겁게 식사를 하기 위한 식당을 고르는 일, 음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기준을 알게 되는 일, 그리고 그 고민과 기준에 동의하고 따라가는 일 모두가 너무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다.
비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모임에서 저녁을 같이 먹을 일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비건 식당을 제안해서 가게 되었다. 비건 식당이라는 언급도 굳이 없었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 비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 날 먹은 음식들 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었고 맛없는 것도 있었다. 비건식당이 아닌 곳들에서도 늘 그랬듯이.
모임의 우리 넷은 모두 비건이 아니지만, 비건식당이 더 많아진다면 그만큼 동물성 식재료를 소비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 비건 식당을 더 찾게 되리란 예상도 해보게 된다.
내가 고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정말 내 취향과 체질이 고기에 맞는다기보다는, 고기를 파는 식당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 자취 이후에 혼자 사 먹거나 차려먹으면서 고기를 덜 먹게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는 수동적인 소비자이다. 그리고 이런 나와 같은 애매한 인간들을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끄는 건 '능동적인 소비자', 이 길을 먼저 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고기보다 채소가 맛있기 때문에 채식을 한다고도 한다. 나도 요즘 고기보다 채소를 더 맛있어하는 중인데, 이런 내 입맛을 다행으로 여길 순 있어도 채식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기가 채소보다 맛있다 하더라도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들이 있다.
환경 파괴 역시 채식의 이유 중 하나로 언급된다. 나는 일회용품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그리 크지 않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축산업의 그 끔찍한 생태계는 빨리 사라지길 바란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동물들을 억지로 태어나게 하고 억지로 가둬두다가 억지로 죽이는 일이 사라지길 바란다.
'학대'나 '학살'이라는 단어로도 담지 못할 그 교활한 행위를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고 있다. 반려동물 학대는 인간의 법에서도 범죄에 해당하는데, 이는 다분히 인간을 위한 법이기도 하다. 반려동물에게 저런 짓을 하는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기반한. 이토록 이기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아이디어라도 좋으니 그 공포와 연민의 영역을 더 넓게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물도 동물을 잡아먹는다'며 반박하는 친구를 만난다면 글 말을 인간의 언어로 하지 말고 동물처럼 짖어보라고 할 테다.
모임에서 비건 식당을 제안했던 친구가 읽은 책 <아무튼, 비건>에서 '어제는 여혐 했지만 오늘은 안 했으니까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명제가 말이 안 된다는 내용을 봤다고 했다. 더 엄격해져야 한다. 나는 아직 '날라리 패션 비건' 정도가 아닐까. 안티 비건보다야 낫지만. 지금 나의 언어는 얼마나 무딜지.
앞선 이들이 닦고 있는 이 길의 끝이 어디인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멀리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 아직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이런 마음들이 그러듯이,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갈 길이 훨씬 멀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