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썸네일형 리스트형 위스키와 집 1 집에 위스키가 두 병 있다. 제임슨과 산토리. 제임슨은 그냥 샷으로 먹을 때 더 맛있고, 산토리는 진저에일과 1:2 비율로 섞은 하이볼로 먹어야 더 맛있다. 캐나다드라이 진저에일을 30캔 박스 채로 배송시켜 쟁여두고 가끔 타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끔’이, 정말 정말 ‘가끔’이다. 두세달동안 한 입도 마시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쯤 혼자 바에 가는 걸 즐기던 시기가 있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는 처음으로 위스키와, 얼음을 구 모양으로 얼리는 얼음틀을 사놨다. 그런데 그건 좀, 어느 정도는 허세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 영화와 소설에서 자주 접한 ‘바’라는 공간과 ‘위스키’라는 술에 대한 동경이 주입된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술이 뭐냐고 물으면 물론 위스키라고, 아일래이 계.. 2020. 4. 20. 비건으로 가는 길 나는 마요네즈에 달걀이 들어간다는 사실도 작년에 처음 알았다. 비건인 분들의 이야기에 일부러 나를 노출시킨 지 1년 정도 되었다. 죄책감과 불편함이 점점 커지고, 고기 소비량은 줄고 있다. 다행히 나처럼 늦게나마 비건에 대해 알아가며 조금씩 실천해가는 주변의 친구들이, 회사 동료들이 늘어가는 중이다. 비건을 지향하는 분과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검색하면서 몇 가지 깨달았다. 일단 처음 깨달은 것은 '식당 100개 중에 99개는 비건이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비건 식당이 많지 않다고 막연하게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찾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더욱 와 닿았다. 그렇게 100개 중 99개의 식당을 넘겨버리면서 깨달았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아쉬운 일이 되진 않는구나'... 2020. 2. 23. 1912 송년회 어쩌다 보니 이번 주 목요일과 금요일 연속으로 약속이 잡혔다. 목요일엔 글로 만난 친구들, 금요일엔 학교(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약속이었다. 사진첩을 열어보니 목요일에 찍은 사진은 없었고 금요일에 찍은 사진은 조금 있었다. 글친구들은 그냥 만났고 학교친구들은 송년회라 하고 만났다. 글친구들은 내 연애에 관해 묻지 않았고 학교친구들은 물었다. 글친구들보다 학교친구들이 문학적인 표현을 더 많이 썼지만 대체로 무뎠다. 글친구들과는 4시쯤 만나 11시쯤에 헤어졌고 학교친구들과는 7시쯤 만나 10시쯤에 헤어졌다. 학교친구들과의 나이차가 비교적 적다.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익힌 기술을 활용해 들어간 회사에서 몇 년씩 일을 해왔고, 이맘때쯤 직장인들이 공유하는 권태감을 가지고 있다. 학교친구 X는 ‘페이지’라는.. 2019. 12. 28. 1911 습작 11월엔 완독한 책 한 권이 없다. 아마 수업을 들으면서 많은 짧은 글들을 읽고 써서 그런 것 같다. ㄱ선생님의 소설 수업은 재작년에 처음 들은 이후로 이번이 네 번째다. 내가 들은 네번의 수업 모두 첫 시간에는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 방법도 항상 비슷했다. 각자가 보낸 최근 일주일에서 가장 인상 깊었거나 나에게 특별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것. 딱딱한 인적사항이 아니라 말하자면 '근황토크'를 하는 건데, 확실히 재미도 있고 분위기도 부드러워진다. 앞으로 서로의 글을 읽고 얘기해줘야 하는데, 본편에 앞선 연습게임 같기도 하다. 글쓰기는 어쨌든 편집이다. 최근 일주일 동안 일어난 많은 일 중에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그중에 이 낯선 사람들한테 해도 괜찮을 이야기는 뭔지, 처음 들어도.. 2019. 11. 30. 1910 +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빛의 과거 이번 달에 사서 읽은 두 책에서는 위안을 많이 받았다. 공감까지 넘보진 않더라도, 내 마음을 앞서 정리해준 문장들로 언제고 다시 떠올리게 될 책들임에는 틀림없다. + 글 쓴답시고 적당히 예쁘고 안전한 말로 폼 잡는 꼴을 얼마나 많이 봐왔나. '감성'적인 것은 텅 빈 것이다. 그냥 적당히 있어보이고 싶은데 훼손당하기는 또 싫은 심리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감성, 감동, 힐링, 정...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그놈의 '느낌'이 뭐길래 그걸로 적당히 퉁치려는 한국어. 그 언어에 가지는 반감을 명확하게 분석하고 정리한 책이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까칠하고 정확한 글에는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부제가 설명하듯, '한국어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책이니까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2019. 10. 28. 미래로 갈 수 없다면 친구가 김초엽의 소설을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그의 SF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은 다음날 서울와우북 페스티벌의 대담 프로그램에 그 분이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예약해서 다녀왔다. 대담의 키워드는 '정상성'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하며 그 기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야기 나누었다. SF 작가 세 분이 모인 자리인 만큼 과학 분야의 사례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남성중심의 과학분야가 어떻게 여성 과학자를 배제하고 있는지, 과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어떤 어려움을 여전히 겪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비정상적인 정상성'을 대하는 SF의 태도는 무엇인지. 정보라 작가를 올 여름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도서전 대담에서 처음 봤다. 그 날의 대담 주제.. 2019. 10. 9. 대만에 왜 또 9월1일부터 9월11일까지 타이베이에서 지냈다. 대만엔 작년에 처음 갔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난 아무래도 여행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대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하게 된다. 더운 나라를 좋아한다. 타이베이의 9월은 서울의 가장 더운 여름보다 훨씬 덥고 습하다. 키 큰 야자수들 보면서 생각한다. 그래 나무들이 저렇게 잘 자랄 수 있는, 1년 내내 따뜻한 곳이 사람에게도 살기 좋은 곳 아닐까? 막 사계절 뚜렷하고 그러면 나무도 별로 못 크고 사람도 사계절처럼 뚜렷하게 난폭해지고.. 습도가 무지 높아서 빨래가 잘 안 말랐다. 아마 이번 대만 방문에서 유일하게 스트레스 받은 일이 있다면 빨래 덜 마른 냄새일 것이다. 어디서든 그 냄새가 조금씩 났다. 맑은 날 하루종일 바깥에 널어 놓아도 .. 2019. 9. 23. 이전 1 다음